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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키보드 연대기

뭐더라토 2022. 11. 16. 22:35

나는 약간 키보드에 진심인 편에 속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굳이 변명하자면, 현대인에게 있어서 키보드는 조선시대의 붓/벼루나 20세기의 만년필과 같은 포지션이 아닐까.

아님 말고.

 

내 키보드 인생의 시작을 시초의 시초부터 돌아보자...

곰곰히 떠올려 보아도, 대학교 이전에는 무슨 키보드를 사용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개인 노트북을 가지게 되었고, 2학년 말에 접어들어 개인 데스크탑을 구매하면서 모니터와 함께 키보드를 샀었던 것 같다.

 

 

 

 

1) 제닉스 STORMX TITAN MARK VI 적축

가물가물하지만 가장 처음에는 비키스타일의 흰색 적축 7만원 짜리 키보드를 샀었다. (*비키스타일: 스위치를 감싸는 하우징 없이 스위치 옆 면이 드러나는 키보드 구조를 일컫는 용어)

검색해보니 아마 이 모델을 사용했던 것 같다.

제닉스 STORMX TITAN MARK VI

1년 정도 사용했었나? 키감도 별로고, 생각보다 키를 누를 때 판에 부딪히는 탁! 탁! 거리는 소리가 꽤 났었다.

흠읍재 하나 없고, 비키스타일인데다가 풀배열이다.

체감상 스트로크 깊이도 깊어서 손가락의 피로감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럴거면 차라리 그냥 로지텍 저렴한 키보드를 쓰는게 낫지 않나?는 생각에 중고로 가져다 팔고, 다음에 샀던 것이 레오폴드였다.

(저렴한 로지텍 키보드는 어디에?)

 

2. 레오폴드 FC750R 적축

레오폴드 FC750R 저소음 적축

 

키스킨을 별매한다는 점에서 끌렸었다.

지금도 내가 아는 선에서 좋은 키스킨을 항상 잘 파는 곳은 레오폴드 밖에 없고 이는 여전히 큰 장점이다.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2000년대 키보드 같은 색상인데, 레트로하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저런 색상의 키보드에 방향키와 W,A,S,D 키에만 누렇게 때가 끼어있곤 했었지...

 

아무튼 4년 반 정도라는 긴 시간 동안 메인 키보드로 사용했었고, 아직도 연구실 책상 위에서 다른 키보드가 먹통일 경우 쓰이는 키보드로 아주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아직도 텐키리스 키보드를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측의 중복되는 텐키를 굳이 가져야 할까?

대략 5년 넘게 텐키리스를 사용하고 있는 나조차, 자주 사용하는 비밀번호 외의 숫자에서는 아직도 오타가 가끔 나오지만, 은행원이 아니라면야 텐키리스를 한번쯤은 시도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박의 여지가 많기 때문에 길게 늘이지는 않겠다.

 

다시 이 글의 주제로 돌아오면,

내가 가장 오랜 기간동안 사용했던, 숫자 1번키가 접촉불량이 되어 잘 안눌리게 될 때까지 사용한 이 레오폴드 저소음 적축 키보드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마음에 드는 키보드다.

 

일단 빵빵한 기본 흡음재와 처음 접해보는 저소음 적축.

거기에 실리콘 키스킨까지 더해서 완전히 다른 고요한 키감을 선보인다.

웹상에서는 저소음 적축 + 실리콘 키스킨은 아예 새로운 축의 일종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배열도 상당히 깔끔하게 ANSI 표준을 따르고 있어 흠잡을 부분이 없다.

 

비싼게 비싼떡이었던 걸까.

14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샀던 것이었던 만큼 애지중지하며 사용했었던 것 같다.

 

아무튼 결론은 레오폴드 저적 + 키스킨은 생각보다 좋았다는 말이다.

기계식인 만큼 손가락을 깊게 눌러야 하기 때문에 펜타그래프에 비해 약간은 움직임이 커진다는 느낌도 있다.

그래도 늘어나고 더러워진 키스킨만 세 번을 새로 사서 갈아 끼웠을 만큼 잘 사용했던 키보드이고, 내가 키보드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 이후로는 텐키리스만 사용하게 되었고, 이때 이후로는 언제나 Ctrl과 Caplock을 바꿔서 사용하게 되었다.

(Ctrl Capslock 바꾸면 진짜 좋습니다 여러분)

 

3. KBD75 V2

2번까지는 정상인의 범주였다면 여기서부터는 이제 약간 선을 넘기 시작한다.

발단은 어느 웹사이트의 글이었던 것 같다.

대충 이런 제목이었나? "님들은 스페이스바 어느 쪽 엄지로 누름?"

내용은 자기는 스페이스바를 한 쪽 엄지로만 누르기 때문에 스플릿 스페이스바 배열에서 다른 쪽 스페이스바에 새로운 키를 적용했더니 정말 좋았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잠시 설명을 붙이자면,

1) 스플릿 스페이스바 배열은 스페이스 바를 쪼개서 사용하는 배열이다.

2) QMK 등의 툴을 사용하면 키보드의 키 배열을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지 ex. 과장한다면 H와 L 키를 1초동안 번갈아 세 번 누르면 F3 키가 눌리도록 설정한다던지) 설정할 수 있다. 애초에 C언어로 설정한다.

3) 나는 스페이스바를 왼손 엄지로만 누른다.

 

상상만 해도 좋아보였고, 당장 QMK를 지원하는 스플릿 스페이스바의 키보드를 샀다.

 

KBD75 V2. 저적에 알루미늄 케이스이다.

KBD75 V2. kbdfans.com 이라는 사이트에서 75% 배열로 출시한 키보드 v2이다.

방금 전까지가 기성 키보드의 영역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이제 커스텀 키보드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스플릿 스페이스바에 꽂혀서는 (가격적으로)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축은 이미 홀릴대로 홀린 저소음 적축을 사용했고, 소리를 더 없애기 위해 흡음재는 물론이고 풀알루미늄 케이스까지 사용했다.

커스텀키보드의 기본인 QMK도 당연히 지원된다.

 

고일대로 고인 커스텀 키보드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일반적인 배열을 사용하고, 타건감이나 디자인에 집중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래서 스플릿 스페이스바를 지원하는 배열이 많지는 않은데,

스플릿 스페이스바를 지원하는 기판 중에서도 가장 큰 75% 배열을 구매했다.

키보드의 가장 필수적인 블록인 좌하단의 Ctrl부터 우상단의 Backspace까지가 60% 배열의 기준이고,

이 75%는 위와 오른쪽에 한 줄씩 더 붙여서 방향키와 Fn키까지 우겨넣은 배열이다.

 

키캡 값으로만 일반 사무용 키보드 하나는 그냥 살 수 있을 정도의 지출을 감당해야 했지만,

윤활까지 완벽하게 마친 저소음 적축의 황홀한 타건감을 느끼고 있자니, 내 마음속의 무언가도 함께 부서지는 듯 했다.

아마 금전감각이 아니었을까.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구매하지 않는 편이 좋았으리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QMK에 입문하게 된 나는, 새로 생긴 오른손 엄지의 modifier키 하나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두고, 자다가도 "이 배열, vscode에서는 어떨까?" 라는 식의 생각에 끊임없이 고민하다가 쓸데없이 시간을 많이 날렸다.

그거 고민할 시간에 그냥 손가락 더 움직여서 타건하는게 몇 배는 더 이로웠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아직도 배열이 가끔 바뀐다.)

 

그래서 QMK로 오른손 엄지까지 사용하니 좋았더냐고?

당연히 좋았다.

실사용에서도 조금은 좋았지만 무엇보다 설정하는 재미와 적응하는 재미가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 Orthogonal 시리즈

4년 반동안 레오폴드 텐키리스를 사용하고 6개월 가량 75%배열까지 완벽하게 적응하고 나니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이거 나 혹시 키보드 사이즈 더 줄여도 되지 않나?"

그래서 그는 지갑을 열었다.

그래서는 안됐다.

위에서부터 Anne Pro2, Preonic, YMD40, Planck

60% 배열 키보드인 Anne pro2 까지는 양반이다. 이건 커스텀 키보드도 아닌 완제품이라 중고로도 자주 팔린다.

하지만 밑에 세 개는 무엇일까.

60% 배열조차 사용해 본 적 없는 나였지만, 근자감이 뿜어져 나온 탓에 나는 50%와 40% 배열을 구매했다.

60% 미만으로는 일반적인 배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독창적인 배열들 뿐이다.

무언가에 홀린듯 구매한 이 오쏘고날 배열이라고도 불리는 이 키보드들은 그야말로 극악의 배열 난이도를 자랑한다.

몇 달을 어떻게든 적응하려고 배열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해 보았지만, 가끔 노트북 키보드와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나로써는 도저히 양쪽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교수님과의 채팅에서 몇 번의 치명적인 오타를 날린 후 결국 사용하지 않게 된다... (엔터 위치가... 다르다..!)

이거... 중고로 팔리기는 할까...

 

5. DZ60

Orthogonal 키보드에 한 번 크게 데인 후,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KBD75v2 키보드에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스플릿 스페이스바가 있는, 60% 배열의, QMK 지원되는 키보드가 있다면?

주저할 것인가?

위에서부터 레오폴드 FC750R 저적, KDB75v2 저적, DZ60 저적

 

DZ60은 두 개다!

DZ60이라고 불리는 것은 PCB 기판 이름으로, 납땜 버전에서만 스플릿 스페이스바를 지원한다.

지금까지 커스텀 키보드들은 전부 납땜을 맡겼었지만, 이번에는 돈도 아낄 겸, 직접 땜질과 조립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일단 해피엔딩부터 말하자면,

현재까지 1년 가량 집과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졸업 키보드이다.

1열에 스페이스 바가 쉬프트의 탈을 쓰고 세 개 있는데,

가장 왼쪽이 일반적인 스페이스바이고, 다른 두 개로 다른 키들을 조합해서 사용한다.

 

궁금하지는 않겠지만, 다년간의 키배열 결론이 지금은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것 정도는 적어둬야겠다.

오른쪽 스페이스바를 눌렀을 때
가운데 스페이스바를 눌렀을 때

손을 움직이지 않고 화살표와 Home, End, PgUp, PgDown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강점이고 가장 자주 사용한다.

F키를 F24까지 설정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평온을 준다.

어? 이 어플리케이션/기능 단축키 뭐 주지? 할 때 무지성으로 Ctrl + F15 같은 걸 줘버리면 된다.

(여담으로 F20부터는 소프트웨어에서 지원 안하는 경우가 있다)

 

 

참고로 최근 맥북을 사서, 키 배열에 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다음 키보드는 뭐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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